[로맨스판타지] 녹슨 칼-건두부 (스포 有)
<녹슨 칼>
기본정보
- 플랫폼: 카카오페이지
- 조회수: 22.09.27 기준 20.1만
- 별점: ★10.0
- 이용 연령가: 15세
- 장르: 로맨스판타지(로판)
- 테마 키워드: #로맨스판타지 #재회물 #기사물 #짝사랑 #순정남 #짝사랑남 #능글녀 #털털녀 #짝사랑녀 #라이벌/앙숙 #애잔물
- 총 화수: 116화+외전 5화 완결
작품 소개
비 내리는 어느 가을 밤, 누명을 쓰고 죽은 기사가 눈을 뜬다.
"히더린 비체 경. 왕을 죽여 줘요."
되살아난 기사, 히더린 비체에게 주어진 것은 12주간의 짧은 삶. 그리고 왕 살해라는 목표.
...와 육아.
제한 시간 안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방황하던 히더린은 살아생전 그녀를 증오하던 성기사와 재회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한때 고결했던 성기사는 인생 밑바닥을 전전하는 주정뱅이로 전락해 있었다.
"관심 없어."
"넌 관심 있는 게 뭐야?"
"네가 꺼지는 거."
"이런, 유감이야. 관심 있는 일을 겪을 수 없게 됐네."
뿐만 아니라 히더린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명예와 영광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그 여자가 없는데."
***
"비체 경."
"히스라고 부르라니까."
"그래도 되나."
"그래도 되긴 뭐가 그래도 돼. 히스라고 부르라고.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잘만 부르더니... 술 조금 처마셨다고 아주 맛이 갔군. 아, 조금이 아닌가."
사르그는 망설였다. 그녀는 흔쾌히 애칭을 허락했지만 사르그는 그 이름을 자연스럽게 발음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는 수십 번이고 홀로 불러 본 이름이었지만 그녀 앞에서 불러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늘, 불러 보고 싶었다. 그러니 한 번쯤은 괜찮을 것이다. 한 번쯤은. 한참 망설이던 사르그는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 히더린."
등장인물
- 히더린 비체: 롯사의 왕녀이자 현왕의 근위대장. 아버지인 기사왕과 어머니인 왕비가 마차 사고로 갑작스레 돌아가신 후, 왕위 계승권과 혼인 등 왕족으로서의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자신의 남동생인 현왕의 기사로서 평생을 살아가기로 한다. 왕과 국가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악역도 자처할 수 있으며, 왕 대신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 악역이 하늘을 찌른다. 기사왕인 선왕에게 인정을 받을 정도로 검술에 타고난 귀재이며, 검술 대련과 괴식을 사랑하는 등 탐미적이고 거리낌 없는 호탕한 성격. 권력은 포기했으나 왕족으로서의 프라이드가 높고 부귀영달을 마음껏 누리려 한다. 동시에 출생의 불완전함에 대한 강력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어, 그를 물욕이나 식욕의 표출로 대신하는 무의식적 습관이 있다. 뇌물을 거리낌 없이 받으며, 거리의 어둠의 무법자에게 화려한 만찬을 조공받는 등 비도덕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듯한 정반대의 인간인 성기사 사르그 글로리오사를 동경하며, 그가 자신이 동경하는 모습 그대로 고결한 인간으로 남아 주기를 바라고 있다.
- 사르그 글로리오사: 크로이체 성기사단의 성기사이자 성녀를 수호하는 기사. 은빛 머리칼 때문에 붙은 이명은 '광휘의 기사'. 윤리 교본을 인간으로 만든다면 그일 것이다. 언제나 정도만 걷고, 낮은 이들을 굽어살피며 부정한 짓은 올바른 잣대에 따라 바로잡는다. 거리의 질서를 억지력으로 유지하는 어둠의 무법자와 히더린이 결탁하는 것을 혐오할 정도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성격이지만, 그것은 순수하게 그가 윤리적이고 신의 입맞춤을 받은 고결한 자여서가 아니다. 그런 고결한 인간이 되어 자신의 불완전함을 덮고 아무도 자신을 짓밟지 못하게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욕망에 반응한 글로리오사 공작가의 성유물인 백색 검 '레스 로그닐데'의 선택을 받아 검의 소유자가 된 그는 글로리오사의 양자로 입적되어 신분을 세탁하고 성녀를 지키는 고귀한 성기사로서 살아가게 된다. 남몰래 동경하고 연모하던 히더린이 죽은 이후 계획적인 폐인이 되어 왕을 암살할 궁리를 하며 살아간다.
- 마가리테: 기적의 성녀. 작게는 치유부터 크게는 소생까지 전지전능한 신의 힘을 타고났다. 어린 시절 사르그와 함께 더러운 거리를 떠돌다 교단에 발견되어 성녀로서 새 삶을 살게 된다. 자신의 비천한 출생을 어떻게든 숨기려고 하고, 그를 위협하는 모든 요소를 피하려고 노력하며 롯사의 국민들에게 헌신하고 봉사한다. 왕인 체사를 사랑하지만, 본인의 반쪽자리 천한 출생으로 열등감을 가진 체사에게 자신의 비천한 길거리 태생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아 그의 청혼을 극구 거부한다. 하지만 그녀를 반려로서 원하는 왕과, 그를 위해 강경책을 쓴 히더린에 의해 강제로 왕비가 되며, 자신의 아이를 두 명이나 죽인 왕을 죽이기 위해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히더린을 4년 만에 소생시켜 왕의 살해를 의뢰하게 된다.
- 체사 비스레티오 생 롯사: 히더린의 남동생이자 롯사의 현왕. 본래는 유약하고 소심한 어린아이였으나 히더린의 강경한 채찍질로 부모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왕위에 오른 후, 왕으로서의 비정함과 냉혹함을 갖추어 나간다. 종국에는 왕족답게 속을 알 수 없는 뜻 모를 사내가 되고, 자신의 단 하나 남은 핏줄인 누이를 오로지 근위대장으로서 이용해 먹을 줄 아는 계산적인 면모 또한 갖추게 된다. 단 한 사람 성녀 마가리테를 순수하게 사랑하지만, 그와의 결합을 거부하는 그녀를 결국엔 히더린으로 하여금 비겁하고 잔혹한 수단을 쓰게 하여 정략결혼을 추진시킨다. 훗날 모종의 이유로 자신에게 헌신하던 히더린에게 직접 누명을 씌워 비참할 정도로 고문을 행한 후 사형에 처한다. 모친이 하녀 출생이라 지독한 태생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히더린처럼 해소할 방법이 없어 엄청난 자격지심으로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 아래부터는 부분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원치 않으시면 읽지 마시기를 권합니다.
줄거리 (스포 有)
4년 전 모종의 누명을 쓰고 목이 잘려 처형당했던 히더린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완전한 죽음에서 부활한다. 그녀를 깨운 사람은 성녀 마가리테. 히더린이 강제로 왕의 반려로 만들어 왕비로서 살아가던 성녀는 왕이 두 명의 자식을 이미 죽였다고 말하며 히더린에게 왕 살해를 의뢰한다. 억지로 왕비로 만든 것에 대해 깊은 부채감을 갖고 있던 히더린은 지난 생은 끝났으니 이번엔 성녀가 바라는 대로, 생전에 약속했던 '소원 하나 들어주기'를 실천하겠다 약속한다. 마가리테의 힘으로 그녀는 유사 시체로서 12주간 살 수 있고, 그 안에 왕을 죽여야 한다. 그리고 왕이 죽이려고 한 셋째 아이 베로니스를 맡아 숨기기로 한다.
성녀의 기사, 그리고 장래가 유망한 성기사이자 차기 성기사단장으로서 명성을 떨치며 살 줄 알았던 사르그가 술집 한구석에 씻지도 않은 채로 앉아 독주를 들이키는 폐인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히더린은 충격을 받는다. 사르그는 히더린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를 잃은 상실감에 정상적인 삶을 포기했던 것. 히더린은 고결하고 위대한 그가 악인이고 더러운 자신을 사랑하는 것 자체를 납득하지 못하고 실망하며 분노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마음 깊은 곳에 감춰 두고는 하는 날것의 감정이었다. 사회적인 체면 탓에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것들.
질투, 시기, 혐오, 경멸, 열등감, 자격지심.
드러내는 순간 자신의 밑바닥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것들.
사르그는 감히 저열한 안도를 드러냈다.
산 사람의 가슴을 갈라 갈비뼈를 열고 생선처럼 펄떡이는 심장을 보여 주더라도, 그가 드러낸 것보다 징그럽지는 않을 것이다.
히더린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저토록 나약하고 비겁한 자는 히더린이 감히 바라보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
녹슬지 않는 검처럼, 어느 때에고 빛나던 성기사가 아니었다. 손 닿지 않는 하늘 위 별처럼 홀로 완전하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
사르그 글로리오사가 아니었다.
그저 닳아 버린 사내였다.
-녹슨 칼 中-
그녀는 살아생전 히더린의 대역이었던 '히스'라고 속여 사르그와 함께 베로니스를 돌보며 왕을 살해할 계획을 도모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생전에는 전혀 몰랐던, 자신에 대한 사르그의 사랑과 애증을 알게 되며 이를 지난했던 과거와 맞물려 번갈아 반추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히더린은 생명력이 뿜어져 나오는 활기찬 붉은 머리의 긍지 높은 왕녀이자, 롯사 왕국에서 제일가는 기사였다. 하지만 그녀는 당연히 자신은 왕이 될 수 없으며 동생인 체사가 왕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 철칙대로, 선왕이 서거하자 곧바로 체사를 왕위에 올리며 자신은 영원히 왕의 기사가 되어 체사와 롯사를 수호할 것이라 맹세했다. 그녀는 롯사를 위해, 그리고 그들의 왕족으로서의 정당성을 위해 체사가 귀여운 남동생이 아닌 비정한 군주가 되길 종용했고, 체사는 그런 히더린을 원망하며 히더린이 원하는 왕으로 거듭나게 된다.
히더린과 사르그는 선왕 시절 열린 검술 대회에서의 인연을 기점으로 가끔 대련을 하는 사이가 되고, 어느 날 사르그에게 히더린을 찾아갈 핑계를 만들어 주기 위해 마가리테가 그를 데리고 왕궁을 정식으로 방문한다. 그 이후 체사는 마가리테와 사랑에 빠지게 되어, 그녀 앞에서만큼은 다시금 순수하고 인간적인 옛날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점점 광적인 소유욕을 드러내어 수단과 상관없이 성녀를 자신의 왕비로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을 갖게 되고, 히더린은 그런 왕의 탐욕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사르그를 북부 토벌대로 멀리 보내어 성녀와 떨어뜨린 뒤 크로이체 대성당에 불을 질러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된다. 이후 왕실에서 피해 복구를 원조하는 대신 성녀와 왕의 정략결혼을 조건으로 제시하여 마가리테는 체사와 강제로 혼인한다.
토벌에서 살아 돌아온 사르그는 전말을 알고 무고한 희생을 벌인 히더린을 신의 이름으로 저주하고, 히더린은 씁쓸함을 감추고 위악을 떨며 사르그를 비웃고 무시한다.
"너는 죽거든 필히 지옥에 떨어지겠지. 네 영혼의 영구한 파멸을 기도하마."-사르그
"신께서 그 기도에 응하길 바라지.-히더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왕궁 연회에서 마가리테가 음독으로 쓰러지고, 체사는 어째서인지 범인으로 히더린을 지목하여 잔인하고 지독한 고문 끝에 참수형을 선고한다.
히더린은 성녀를 파멸로 밀어 넣은 악인인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르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환멸마저 느낀다. 신의 입맞춤을 받은 고결한 성기사가 한순간에 추잡하고 나약한, 보통의 인간으로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 혐오 속에는 분명, 미약하게나마 사랑스러움이 깃들어 있고, 히더린 자신의 태생에 대한 끈적이는 자격지심과 깊은 열등감이 내재되어 있다. 사르그 또한 무고한 희생과 악행을 저지른 히더린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에 대해 순수히 기뻐하는 자신에게 혐오스러움을 느끼지만, 사랑은 그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내 세상의 중심을 기울게 만드는 절대적인 중력.
사르그는 히더린에 대한 욕망과 깊은 애정을, 히더린은 자신의 시한부와 부활하게 된 이유를 서로에게 끝끝내 숨긴 채, 성녀 마가리테를 위해 왕을 죽이고자 움직이게 된다.
왕은 대체 왜 누이인 히더린에게, 자신만을 위해 충성하던 근위대장에게 누명을 씌웠는가? 왜 손목과 발목의 근육을 끊어 내기까지 하는 잔혹한 고문을 지시했는가? 왜 마가리테가 낳은 자신의 아이를 둘이나 죽인 것도 모자라 셋째인 베로니스까지 죽이려 했는가?
히더린이 유사 시체로 눈을 뜨는 그 순간, 종말의 수레바퀴는 진실을 향해 구르기 시작했다.
감상
카카오페이지의 작품 소개가 안티인 작품. 여주인 히더린과 남주인 사르그가 경박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티키타카하는 장면은 물론 많지만, <녹슨 칼>의 골자는 그게 아닌데 그것만 들어가 있어 안타깝다. 또한 왕녀 베로니스를 숨기고 키우긴 하지만 며칠 정도의 아주 잠깐이며 그 자체는 심각한 이야기 중 잠시 환기하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별로 중요한 뼈대는 아니다. '육아'라는 단어를 보고 가벼이 눌렀다가 실망하는 독자가 있을 듯하여 걱정이다.
기본적으로 히더린은 사르그의 사랑을 부정하고 환멸하며, 사르그는 히더린과, 히더린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증오하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그리워한다. 그런 혐오 관계가 아주 잘 녹아들어 있는 호러+스릴러 정도로 보면 되겠다. 다음의 대화에서 그 관계성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나 진실이 알고 싶나. 좋아. 그럼 네가 그토록 원하는 진실을 들려주지. 신성 모독, 4건의 방화, 59건의 살인, 수백 건의 협박과 폭행. 그 여자의 죄명이지. 그때 죽은 건 순결한 피해자가 아니라 더러운 죄인이었다. 밝힐 결백도 없다고. 그게 진실이야."
"......."
"너는 네 책임이 아닌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가장 최악인 건 죄책감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거고."
"......."
"그게 바로 네가 알아야 하는 진실이다. 이 멍청한 자식아."
"너도 진실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군. 감히 왕녀에게 삿된 마음을 품었노라 토로하고 싶은 마음을 수도 없이 잘라 내고 꺾어 냈다. 그 여자가 죽기 전까지. 언제나 그랬다."
"웃기지 마라. 네가 그럴 리가 없어."
"네가 나에 대해 무엇을 알길래 그렇게 단언하는가, 비체 경."
"너 사람 말을 듣기는 하는 건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도 지겹다."
"비체 경. 그런 격식 차린 호칭 대신, 친근하게 히더린이라고 이름이라도 한번 불러 볼 것을. 왜 그러지 않았을까... 내내 후회했다."
"......."
"그 여자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녀를 히더린이라고 감히 불러 볼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었다고, 감히 기도했다."
"........"
"그게 나의 진실이다."
-녹슨 칼 中-
건두부 작가 특유의 건조한 유머와 유쾌한 블랙 코미디가 곳곳에 들어가 있다. 심각하게 읽던 도중에 눈을 질끈 감고 웃음을 참게 만드는 식이다. 그러다가도 한순간에 폭풍이 휘몰아치듯 뒤통수가 얼얼한 반전이 급습하고 가슴 먹먹한 절망이 느껴진다. 그리고 작품 말미에는 생각지 못했던 인물의 전능함과, 그로 인한 공포마저 느끼게 된다.
여주인공 히더린은 왕녀로서의 긍지가 드높은 인물이지만 동시에 왕녀로서 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내면의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다. 자신의 지위와 존재감을 '지키기 위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자리를 쟁취한 불꽃 같은 인간이다. 그녀는 작품 내내 자신의 악행을 변명하는 듯한 발언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자신의 죄의 무게를 담담히 짊어지며, 성녀가 유사 시체로 되살려낸 두 번째 삶은 자신이 응당 감내해야 할 지옥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녀는 비천한 태생의 자신과 달리 고결하고 고귀한, 독실한 신의 사자인 사르그를 동경하며, 손이 닿지 않는 별처럼 언제나 위에서 찬란히 빛나기를 바란다. 천박하게 태어나 모든 걸 빼앗고 움켜쥐어 놓지 않고 발악하는 자신은 사르그와 함께 걷는 것조차 경우에 두지 않고, 그저 왕의 기사로서의 명예로운 삶만이 자신이 선왕의 자식이라는 방증임을 끊임없이 되새긴다.
평범한 로판 여주들과는 애초 궤부터 달리하는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책략가며, 인간으로서의 양심은 갖고 있지만 그것이 결코 왕을 위한 악행을 저지할 수 있는 브레이크는 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내가 만나 왔던 수많은 로판 여주들 중 히더린 비체라는 이름이 유독 기억에 남게 되었다.
남주인공 사르그는 언뜻 보기에 독실한 성직자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었고, 육욕을 포함한 모든 욕망은 천박하다고 생각했으며, 귀족이 죄를 저지른다고 해서 그걸 눈감아 줄 수 없는, 타협하지 않는 정의의 소유자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 보면 그는 비천한 출생을 숨기고 글로리오사 공작가에 입양되어 신분을 감쪽같이 세탁하고 출생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말을 아끼고 유흥을 멀리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그의 고귀한 이미지에 박차를 가했으니 일석이조지만. 그렇게 독하게 금욕적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자신의 태생을 감추기 위해,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성녀의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이 나라에서 핏줄은 곧 왕관이고 태생은 곧 권력이었기에. 그에게 찾아온 글로리오사 공작가라는 기회를 그는 탐욕스레 움켜쥐었고 절대 놓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워 온 몸가짐과 성기사로서의 능력과 명성은 자연스레 그를 차기 교황으로 입에 올리는 이들이 늘어날 만큼 높아졌지만, 그는 마음 한구석에 언제나 일말의 배덕감을 갖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러던 중 태양같이 밝고 불타는 듯한 생명력을 지닌 , 천박하지만 거침없고 뻔뻔스럽지만 당찬 히더린을 만나 검을 맞대며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 감히 비천한 내가 왕녀를 어떻게 좋아하겠나, 하는 자격지심은 죽을 때까지 숨겨 둘 생각이었을 것이다.
히더린과 사르그처럼, <녹슨 칼>의 주요 등장인물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바로 '태생'에 대한 열등감. 그들은 단 한 명도 자신의 출생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그 출생이 불러온 그들의 삐뚤어진 선택과 숨기고자 한 비밀, 탄로 났을 때의 절망이 불러온 비극이다.
시작부터 참수형을 당한 히더린의 시체를 마가리테가 목을 꿰매어 되살려 내는 장면으로 시작하며 뒤로 간다고 덜해지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약간의 고어함과 호러가 느껴지는 분위기이니 주의할 것. 15세 연령 기준을 넘어설 정도로 잔혹하진 않지만 그 상황을 상상해 본다면 상당히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많다.
덧붙여 스켈레톤과 구울, 듀라한 등 언데드 몬스터가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다크 판타지 세계관이지만, '부활'에 대한 설정 외에는 특별히 머리 아프게 알아야 하는 복잡한 설정은 없다.
권선징악의 결말도, 열린 결말도 아니다. 애초에 이 작품에는 완전한 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열린 결말로 끝낼 수 없는 게 히더린은 12주의 시한부가 예고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베드 엔딩이나 눈물을 자아내는 새드 엔딩은 아니니, 완전한 해피 엔딩은 아니더라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결말을 좋아한다면 <녹슨 칼>을 추천한다. 히더린과 체사의 악행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지만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그것을 들어 줄지 말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겼다.
필력도, 흡입력도, 인물의 치밀한 심리묘사와 셰익스피어가 떠오르는 희곡적인 대사와 표현들은 건두부 작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이다. 로판이나 웹소설이라는 카테고리로 묶기에는 그 수준이 몹시 높다. 다음 작품은 더욱 완벽하지 않을까, 하고 자연스레 기대하게 되는 작가다.
비 오는 날 어둑어둑한 분위기에서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나는 히더린이 그래도 행복하길 바란다. 당신은 어떠한가?